142회 (2024.03.20)

안녕하세요. 박정민입니다.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해와 바람이 적절하네요. 나만 적절하다면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오래 기억에 남을 그런 날입니다. 완벽히 평범한 하루 말이죠.

 

아무래도 날이 아까워 대충 씻고 집을 나섰습니다. 읽다 만 책과 수첩, 필통과 카메라가 든 가방을 둘러메고 자전거를 몰았습니다. 잠시 끼니를 때우려 동네 식당에 자리를 잡고 버릇처럼 휴대폰을 열어 뉴스거리를 찾았습니다. 그러고는 이내 시시해져, 아는 형 인터넷 방송에 들어가 댓글을 달며 씰룩거립니다. 숭어가 올라간 회덮밥이 금세 나왔습니다. 초장을 적당히 넣고 밥을 비비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슬픈 마음이 듭니다.

 

‘왜 이렇게 상추가 많아’ 하면서 괜한 넋두리를 바닥에 떨굽니다. 졸지에 들어찬 마음의 얕은 요동이 상추 때문은 아닐 것이라, 잠시 요 며칠을 복기합니다. 삐리릭. .... 살면서 수백 번은 반복했을 익숙한 과정입니다. 그 익숙함에 처연해져버리기 전에, 얼른 숭어 살점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켰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이리도 별안간 찾아오는 것이라, 곳곳에 위로를 놔두어야겠다고 말입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_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전 이 시를 정말 좋아합니다. 형 같아서요. 그래서 좋아합니다. 있지도 않은 큰형이 “괜찮아, 새끼야. 안 죽어” 하고 돌아서며 땀에 젖은 넓은 등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던 것도 같아요. 나도 형처럼 될게. 형도 그렇게 슬프니까. 나도 형에게 위로가 될게. 그러니까 울지 마. 울지 말자, 형. 나한테 말해. 있지도 않은 형이니까, 꿈에라도 나타나서 말해. 꿈에 와준다면 내가 이 시를 형에게 선물할게. 형은 나의 별이고, 난 그 별을 정말 좋아해. 괜찮아 형. 다들 형을 좋아해. 정말 많이 좋아해.

별.일.없.는. 하루는 어느 하루 때문에 갑자기 요동을 쳤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오늘 이 시로 저는 또 위로를 받았고, 씩씩하게 자전거를 몰아 내달렸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안전한 곳으로. 완벽히 평범한 곳으로 페달을 밟았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을 지나 시가 있는 곳에 파묻혀 또하나의 위로를 뒤적였습니다. 별안간 찾아올 슬픔을 탄탄히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작은 책방에 들러 소설책 한 권을 샀고, 그곳이 썩 마음에 들어 밖으로 나와 사진을 찍었습니다. 갑자기 한 취객이 얼굴을 들이밀고 자기를 찍으라고 합니다. 허름한 양복을 입은 흰머리 신사였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사진기를 거두자, 느닷없이 넌 누구를 지지하냐며 정치적 견해를 물어옵니다. 답이 없는 내게 “그 쌔끼는 씹새끼야! 절대 마음을 줘선 안 돼!” 하며 아직 싹이 트지 않은 개나리를 맨손으로 꺾어댑니다. 어린나무를 꺾어대는 저 초로의 손에도 위로가 필요해 보여 난 그 쌔끼에게 마음 준 적 없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괜한 마음인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어느덧 마지막 글입니다. 애초에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었던 시를 마지막에 둔 이유는 내게 남는 것이 없어질까 두려워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있지도 않은 형을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곳에 놔두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사시에 저의 이 애처로운 러브레터와 박준 시인의 시를 위로삼아 순간을 견뎌내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이 삼 개월의 시간과 여러분이 주신 응원을 저의 곳곳에 놔두고 슬픔을 이겨내겠습니다. 아마도 그 슬픔만큼은 제게 오랜 시간 자랑이 될 수 있겠지요.

그동안 얌전하지 못한 글 받아봐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만큼 죄송하기도 하고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면 조금이나마 더 잘 쓰는 사람이 되어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감당할 만큼의 슬픔과 감당하기 힘든 행운이 깃든 봄날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박정민 드림  

2024년 1월, "시를 사랑해 볼까해"라는 남다른 솔직함으로 <우시사>를 찾아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선물해주신 박정민 배우님과 작별인사를 하는 날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간 박정민 배우님과 함께하는 <우시사>를 사랑해주신 분들이 많으셨는데요. 여러분 만큼이나 <우시사>팀 역시 아쉬움이 크고 슬픈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시사> 소식은 박정민 배우님 스페셜로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이 남겨주신 피드백부터 그간 소개된 시집까지, 그동안의 시간을 추억해보아요. 
💌 독자 피드백  
매회 큰 사랑을 받았던 박정민 배우의 레터! 여러분의 감상을 공유합니다.

💭 이번 정민님의 우시사는 나의 부족한 부분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나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상으로 독자의 생각에 다정히 다가옵니다. 언급하신 '소개'라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정민님의 방식으로 맞이한 시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그 소개를 토대로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맞춰 또 여러 갈래로 흡수합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순환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덕분에 견문을 넓힙니다. 늘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140호 피드백


💭 시를 마냥 어렵게만 느껴도 괜찮구나.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그래도 시를 읽어보고 싶다 하는 마음을 들게 해서 좋았습니다. _138호 피드백


💭 박정민 배우의 편지가 늘 기다려집니다. 왜냐하면… 진짜 저 같은 사람들 눈높이에서 써주기 때문이죠! 특히 오늘 "개연성이 없어도, 앵글이 후져도, 지루하고 박자가 엉망이어도 모든 삶엔 각자의 제자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무가치한 것도 아니고요. 아무리 내가 살아가는 자질이 없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 대표작은 ‘내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내 직업이 내 생애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시인의 그 문장이 오늘은 조금 덜 절망하게 만듭니다. 참 감사한 발견입니다." 이 부분이 많은 위로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_136호 피드백


💭 시인이 이렇게나 다정합니다. 그런 사람의 꿈을 품에 지니고 사는 것은 상당히 낭만적인 일이겠구나 싶습니다. 오늘 메일은 제가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게 되는 메일이었습니다. _134호 피드백


💭 박정민 배우가 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랑을 얘기하는 시를 선택하고 이를 곱씹는 과정이 제게도 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우님과 같이 시를 어려워하는 사람이지만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면 저도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_132호 피드백

📚 박정민 X 문학동네시인선  

6편의 편지와 6편의 시, 박정민 배우가 레터에서 소개한 시들을 만나보세요.  

🙋Who's NEXT  

마지막으로, 박정민 배우를 이어 여러분을 시의 세계로 초대할 새로운 <우시사> 필자 정지돈 소설가를 소개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데 10년, 그리고 증오하는 데 10년을 보냈다는 정지돈 소설가와 함께하는 앞으로의 <우시사>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

오늘 <우리는 시를 사랑해>는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소중한 피드백은 우시사를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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