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친배우미, 안녕하신가요?
5월 마지막 주인데 마치 초여름 느낌입니다. 그래도 마스크를 살짝 벗고 흙내음을 맡으면 아직 봄이구나, 생각이 든답니다. ‘마친배우미’ 소식 열세 번째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그림책 작가님을 모셨습니다. 더배곳에서 디자인인문연구과정을 마치고 홀로 그림책 작업을 하며 올해 두 권의 그림책을 연달아 낸 윤정(김윤정)입니다. ‘육월식’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윤정은 작년 국내 신진 그림책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했는데요. 무엇보다 초등학생 주현이의 주 양육자랍니다. 주 양육자와 작가의 역할을 균형 있게 소화하려 노력 중인 윤정을 만나, 작업과 삶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기대해도 좋습니다!

김윤정 Kim Yun-jeong 
필명 육월식 walseek

그림책을 만들고 공부하는 사람이자 한 아이의 주 양육자

2021  『모든 이빨 연구소』,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 출간
2020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수상 -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
2019  현대어린이책미술관 제2회 《언프린티드 아이디어》 전시 참여
2018  PaTI 더배곳 디자인인문연구과정 졸업 (「종이 위의 유토피아—러시아 혁명기 그림책과 작가들」)
2005-2015  아모레퍼시픽 본사 및 중국 상하이 지사 근무
2005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윤정. 안녕하세요. 무엇보다 그림책 출간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모든 이빨 연구소』는 지난 4월 말에 나왔고,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는 5월 말에 출간됩니다. 비슷한 기간에 그림책을 두 권 내니까 저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아요. (웃음) 타이밍이 겹쳤어요. 『모든 이빨 연구소』는 2019년 12월 전시를 하면서 작업이 완전히 끝났는데요. 어쩌다 보니 정식 출간이 올해 4월로 잡혔던 거였고,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는 지난 2020년 3월부터 10월까지 작업한 그림책이랍니다.
『모든 이빨 연구소』는 정식 출간 전에 전시를 했었네요. 무슨 전시일까요?
2018년 하반기부터 조금씩 시간이 날 때마다 개인적으로 작업하면서 진행하던 그림책이 『모든 이빨 연구소』인데요. 2019년 상반기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자리 잡은 현대어린이책미술관(MOKA)이 그림책 관련 공모전을 열었어요. 완성된 책 작업을 선발하는 게 아니라 섬네일과 스토리보드를 포함한 기획서 중에 11개를 선발해서 정해진 기간 안에 더미를 완성하고 《언프린티드 아이디어Unprinted Idea》라는 전시로 끝내는 프로젝트였죠. 기획서를 받고 2차 선발에서 최종 11인에 뽑힌 게 6월이었을 거에요. 그리고 초겨울까지 더미 작업을 했죠. 전시는 2020년 3월 말 마치는 일정이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3월 초 종료됐답니다.

윤정의 첫 그림책 『모든 이빨 연구소』 더미 (2019)
《언프린티드 아이디어》 전시(현대어린이책미술관, 2019.12-2020.3)
코로나19가 생활 곳곳에서 사람들을 힘들게 하네요. 윤정은 괜찮으세요?
이제는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요. 물론 매체를 통해 들리는 확진자 수는 계속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니까 괜찮다고 말하기엔 힘들지만, 저 자신에게는 확실히 많이 좋아졌어요.
코로나19가 윤정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나 봐요.
같은 코로나 위기라고는 하지만 계층이나 성별에 따라 겪어야했던 고충은 천차만별이었잖아요. 저에게는 아이가 하나 있거든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작년에 학교가 다 문을 닫았잖아요. 그래서 1년 동안 학교를 거의 못갔죠. 나간 횟수가 총 25일인가 그랬어요. 저 외에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제가 작업자로서 오전에 혼자 작업할 수 있는 날이 1년에 총 25일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주 양육자 역할을 하면서 작업을 하려면 아이들이 학교나 학원을 간 시간 외에는 작업을 하기 어렵거든요. 잠을 줄이지 않는 이상. 주부에게 주말은 원래 집중 근무 시간이고요. 그런데 올해는 매주 3번씩 등교하고 있어요. 지금 대충 세어봐도 벌써 작년 등교 횟수를 넘어섰네요! 그래서 저한테는 조금은 더 나아졌다고 말했던 거랍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2년 동안 개인 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요.
사실 제가 그림책 더미를 만들고 출판까지 하는 데 공모전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마감이 정해지니 완성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거든요. 혼자서 작업하면 일이 계속 진척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더미를 만들어 전시도 했는데 출간에 힘쓴 이유가 있나요?
현대어린이책미술관 공모전은 독자 투표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업에 독립출판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귀결됐는데요. 중요한 사실은, 전 뽑히지 못했어요. 나는 아니었어…(웃음) 첫 작업을 전시로 내보인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을 한 것이죠. 그럼에도 저는 『모든 이빨 연구소』가 전하는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투고를 열심히 했습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까 코로나19 때문에 자택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출판사 투고가 급격히 올라갔다고 하더라고요. 소설책은 메일로 글을 보낼 텐데, 그림책은 어떻게 투고하나요?
결론적으로 별다른 건 없어요. 요즘 원화를 들고 출판사 문을 두드려서 약속 잡는 시대는 아니라서요. 그림책 작가도 인터넷을 쓸 수 있으니 소설과 똑같지요. 하하. PDF로 정리한 작업을 여러 출판사 담당자에게 보내면서 출간이 가능한지 검토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물어보는 거예요. 과거에 비해 물리적인 제약이 없으니 투고가 늘어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저도 꽤 많은 출판사에 투고했어요. 아예 답이 없는 곳도 있었지만 아주 애정 어린 조언을 받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출판사 한 곳과만 뜻이 맞으면 출간이 가능한 구조라서요. 저는 ‘씨드북’이라는 출판사와 인연이 닿았어요. 
씨드북은 『모든 이빨 연구소』의 어떤 부분이 좋았다고 하던가요?
구체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어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아마 유치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다고 느낀 것 같아요. 아, 제 그림이 “따뜻하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이 나네요.
『모든 이빨 연구소』 얘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어떤 지점이 매력적인지 유추해볼게요. (웃음)
『모든 이빨 연구소』은 유치가 빠진 모든 아이를 위한 이야기에요. 주현이가 유치가 빠졌을 때 뭔가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는데 마땅치 않은 거예요.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헌 이를 지붕에 던지면 까치가 가져가고 새로운 이를 가져다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문제는 지금 우리는 모두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유치를 던질 지붕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제 까치 이야기를 공감하기가 쉽지 않은 거죠. 그렇다고 유치와 영구치의 차이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런데 유치가 빠지는 주현이가 경험하는 성장으로서의 변화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계속 남았죠. 그러다 『모든 이빨 연구소』의 이야기를 짓고, 그림까지 그리게 되었네요. 스토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아요. 주인공 주현이와 함께 사는 토끼 예예는 나이가 들어서 앞니를 모두 잃어버려요. 가장 좋아하는 생당근을 먹을 수 없게 되죠. 참고로 예예는 중국어로 ‘할아버지’라는 뜻이에요. 주현이는 이런 예예를 위해 곧 빠질 것 같은 자기의 유치를 예예에게 주겠다고 약속해요. 그런데 실수로 유치를 잃어버리고 말죠. 이빨요원인 까치, 치치를 따라 잃어버린 이빨을 찾으러 ‘모든이빨소’에 가는 이야기랍니다.

『모든 이빨 연구소』 그림 원화
주현이는 『모든 이빨 연구소』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주현이는 2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본인 생각으로는 헬리콥터처럼 멋진 탈 것들이 더 나와야만 한다고 하네요.
스토리 구성과 그림 작업을 혼자 도맡았어요. 이야기로 전달하고 싶고, 정보도 담고 싶고,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무척 많았을 텐데 하나의 그림책으로 균형 있게 구현하는 일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제가 원래 리서치하는 걸 워낙 좋아해서 너무나도 많은 재미난 사실들을 발견해버렸거든요. 그래서 그걸 다 이야기에 넣으려고 하니까 처음에는 거의 단편 동화 급이 되버렸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물론 어려웠지만, 이야기를 줄이고, 또 줄이는 과정이 제일 힘들었어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제가 생각해도 정말 재미있는 이빨에 관한 사실들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었는데요. 이빨에 관한 사실은 무수히 많은데 그중 제게 강하게 인상을 남긴 요소들은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어지기를 가장 바랐죠.
『모든 이빨 연구소』는 윤정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PaTI를 다닐 때 저는 ‘그림책을 직접 그리는 사람은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근데 졸업 이후 혼자 작업을 해나가면서 ‘나도 할 수 있어!’라는 희망을 준 프로젝트가 됐죠. 그리고 그림책 디자인은 PaTI에서 만나 친구가 된 곽지현 디자이너가 맡아줬는데, 역시 책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님을 다시 배운 기회였답니다. 물론 부족한 부분은 존재하죠. 하지만 이 책이 전달하는 이야기가 분명 누군가에게 의미 있게 다가가고,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어요. 불만족한 이 상태에 만족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비룡소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한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
자, 이제 두 번째 책으로 넘어가 볼까요.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는 비룡소 황금도깨비상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어떤 상인가요?
황금도깨비상은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인 비룡소가 1992년부터 거의 매년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 상으로, 한국 그림책 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그림책 공모전 중 하나로 알고 있어요. 제가 받은 게 가장 최신인데 벌써 27회 째에요. 완성한 더미를 제출하고, 심사를 통해 수상작을 결정하는 시스템인데요. 전에 응모했던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이 이례적인 경우고, 대부분의 그림책 공모전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 같아요.
온라인 서점에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코너가 따로 있더라고요. 이렇게 멋진 상을 받고 출간하면 어떤 면에서 좋을까요?
출판사는 오랜 기간 운영한 공모전의 수상작이란 타이틀로 마케팅을 할 수 있어서 좋고요. 신인 작가의 경우, 매년 수많은 그림책이 출간되는 상황에서 독자의 관심을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어서 좋죠. 요즘 사람들이 아무리 책을 안 읽는다, 안 읽는다고 해도 여전히 팟캐스트, 유튜브 등의 플랫폼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꽤 많이 나누는데요. 거기서 그림책이 다뤄지는 경우는 무척 적거든요. 그래서 책이 세상에 나온 걸 알리는 일부터가 어려움의 시작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수상’이라는 타이틀은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에요.
황금도깨비상을 받은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릴게요!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는 팬데믹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에요. “만지지 못해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란 질문에서 출발한 작업인데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선인장으로 출연한답니다.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수상 평을 인용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이수지 선생님은 “마스크를 쓴 선인장 아이라는 흥미로운 주인공, 이야기의 탄탄한 구성과 차분한 그림, 글 없이 많은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그림 속 성실한 디테일이 마음을 끌었다”고 하셨고 이지원 선생님은 “공들여 잘 만든 프레임들 속에 배치된 부드러운 흑백의 수묵 채색의 면들 속의 뾰족한 선인장 주인공들의 가시에 감정이 이입된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림책 작가가 되기까지 제게 많은 영향을 준 두 분의 응원을 받은 것 같아 더욱 감사했어요. 특히 ‘트렌디하다는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시대의 서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시절을 뛰어넘어 오래 남는 그림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평이 기억에 남네요.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 그림 원화와 작업 과정
저를 사로잡은 건 ‘글 없는 그림책’이란 특징이에요. 『모든 이빨 연구소』는 글이 진짜 많아서, 제가 보던 그림책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글이 없으니까 같은 작가 작품이 맞나 헷갈릴 정도였어요. 글을 아예 없애버린 이유가 궁금해요.
첫 책을 만들 때 이야기를 쓰며 글 위주로 작업하고 그림을 그려보니 시각적인 표현 거리를 잡아내는 게 어렵더라고요. 게다가 ‘내가 과연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그림책 작업을 앞으로 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떨치지 못했고요. 그래서 다음 책은 그림으로만 얘기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윤정은 극과 극을 달린 것 같아요. 포트폴리오의 일관성이 혹 걱정되지는 않나요?
‘아, 육월식이란 작가의 책을 봤는데, 다음에도 이런 게 있을 것 같아’라고 독자가 기대를 품는다면 작가로서 이에 부응하는 태도가 중요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일관된 작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지 않아요.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매체를 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작업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팟캐스트 ‘씽투육아’ 작업을 하기도 했고요. 제게 주어진 매체를 그림책으로만 고정 짓지 않으려고요. 이런 육월식을 매력 없다고 판단하는 이들에게는 썩 영리하지 못한 방식이겠지만, 제가 그냥 이런 사람인 걸 어쩌겠어요.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있답니다. (웃음)
『친구를 만지지 않아요』를 작업하면서 어떤 게 가장 힘들었어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해서 참 어려움이 많았죠. 코로나19 때문에 작년 주현이가 거의 학교에 못 가고, 학원도 자주 문을 닫았는데, 아이가 학교나 학원에 있는 시간에 주로 작업을 진행하니까 제 작업 시간이 통째로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죠. 그래서 1주일에 하루 정도 밤샘하면서 대략 6개월 정도 작업했어요. 작업 자체가 힘들었다기보다 비정상적인 일상이 힘들어서 작업하지 않으면 맨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이제 두 책의 엄마가 됐는데요. ‘첫째가 좋냐, 둘째가 좋냐’란 질문에 대한 현명한 엄마의 답변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이래서 좋고, 둘째는 저래서 좋다’라고 말할래요. (웃음) 우선 ‘첫째’는 제가 PaTI를 졸업할 때까지 해내지 못했던 그림책 작업을 완성 단계까지 끌고 간 첫 작업이라 제게 굉장히 큰 의미를 가져요.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현이 뿐 아니라 먼 타지에 사는 사촌 언니와 계속 소통했거든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치과의사로 이 책의 감수를 맡은 백세미 님이 바로 사촌 언니랍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제 아이 이름과 같고, 모든 디테일 또한 저희 가족의 삶을 담고 있어요. 반면 ‘둘째’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제게는 또 한 번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제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고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글 없는 그림책도 생전 처음 시도해봤고요.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더 깊게 고민해본 작업이라 의미가 남다르죠.
저자 이름으로 본명이 아닌 ‘육월식’이란 필명을 쓰는 게 이색적이에요.
제 본명이 거의 ‘82년생 김지영’ 같은 이름이잖아요. 그래서인지 이미 데뷔한 그림책 작가 중에도 동명이인이 꽤 있는것 같아요. 그러던 중 PaTI에서 오진경 스승의 북디자인 수업 때 처음으로 그림책 작업을 했는데 그때의 결과물인 『눈물할아비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붉은져고리 그림 이약이책』의 지은이 이름을 넣는 과정에서 본명이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마침 읽고 있던 책에서 ‘육월식六月息’이라는 구절을 만났고요. 본래 해석과는 상관없이 ‘유월의 숨’이라는 뜻이 떠올랐고, 여기에 꽂혀서 육월식이란 이름을 제게 붙여주었습니다. 주현이가 6월에 태어났는데 이때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출산 후 삶이 바뀌었다’란 표현이 참으로 클리셰로 느껴질 수도 있고, 요즘 분위기에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엄마가 된 것이 제 모든 걸 바꿨다는 표현이 결코 틀리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답니다.

PaTI 재학중 작업한 그림책 『눈물할아비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붉은져고리 그림 이약이책』(2016) 
한국 최초의 어린이 잡지 《붉은져고리》(1913년)에서 가져온 일러스트레이션을 디지털로 콜라주해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한 작업
자, 이제 PaTI 때로 돌아가 볼까요. PaTI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 집안 사정으로 어문학과에 진학했어요. 중화권에 관심이 있어서 중문학을 전공했죠.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었지만 역시나랄까 여유 없이 뭔가에 쫓기듯 회사에 들어갔어요. 날개(안상수)는 회사에서 진행한 중문 서체 개발 프로젝트에서 처음 만났어요. PaTI도 그렇게 알게 됐죠. 날개가 입학을 권한 건 아니었지만, 퇴사 후 그림책 작업의 기반을 닦을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PaTI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더배곳 실기로 입학해 디자인인문연구과정으로 졸업했다고 들었어요. 계기가 궁금해요.
그림책을 내 손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PaTI에 입학했는데, 더배곳 첫 학기 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저 자신을 마주했어요. 최범 스승의 수업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작업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고요. 좌절도 했지만, 평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인문연구과정도 저한테 맞을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과정을 옮겨도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더라고요. 갈등도 했지만 그냥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마음껏 하는 시간을 제게 선물한다는 생각으로 배곳을 다닌 것 같아요. 그러다 박지훈 스승을 만나게 됐고, 연구와 작업이 꼭 따로 갈 필요가 없다는 걸 그분 작업에서 확인하게 됐어요. 꼭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무엇보다 제 관심사가 바로 ‘이야기’라는 걸 깨달은 게 큰 성과였어요. 배곳이 인문과 실기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구조라 연구자와 작업자 사이에서 탐색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PaTI 졸업 작업 「종이 위의 유토피아-러시아 혁명기 그림책과 작가들」(2017) 
 예술로서의 그림책의 원류를 좇다 만난 소비에트 시대의 그림책과 작가들의 이야기를 묶은 책

이 작업으로 서점과 도서관 등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사진은 B플랫폼 강연 모습, 2018
오랜만의 학업 생활이 어색하진 않았나요?
PaTI는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분위기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 꽤 시간이 필요하긴 했어요. 게다가 주현이를 돌보면서 배곳을 다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좋았어요. 저와 결이 맞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까요. 배곳에서 지내며 나이보다 태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크게 경험했죠.
아직도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을까요?
가장 많이 울었던 수업을 말하면 되려나요. 오진경 스승의 북디자인 매뉴얼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한계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느낌을 받았어요. 평생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은 절대 해선 안 된다고 배웠고, 저도 피해당하는 걸 싫어했어요. 근데 거의 합숙하듯 수업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작업에 몰두하려니 아이가 있는 저는 뭐만 하려 해도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게 되더군요. 당시 머물던 파주 근처에 가족도 없었거든요. 결국, 오진경 스승, 켈리, 하빌, 아멜, 아멜 어머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작업을 진행했답니다. 함께 수업을 듣던 배우미들은 말할 것도 없죠.
PaTI에서의 경험은 윤정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집밖에서 뭘 자꾸 주워오게 되었고요. (웃음) 정말 좋은 동료를 많이 만난 덕분에 지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PaTI에서 엄마이자 작업자로 살아가는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사람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조건이 존재하는 걸 엄마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인정하게 됐어요. 가족이 아닌 타인이 약자의 위치에 있던 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도움을 준 경험은 결코 잊지 못할 거에요.
혹시 지금 PaTI를 다니는 배우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해도 될까요?
가장 어려운 질문인데…“무릎이 성할 때 더 열심히 돌아다니세요”라고 말하고 싶네요.

PaTI 더배곳 친구들과 함께, 2017
지금 2021년 윤정은 김윤정이자 아내, 엄마, 그림책 작가죠. 여러 역할을 동시에 맡으며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힘들진 않나요? 이런 상황이 작업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요?
이 부분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해요. 주변 작가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요. 작업자라면 누구나 ‘제대로’ 작업을 하고 싶잖아요. 작업에 대한 욕심과 아이와 좀 더 즐겁게 지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요. 근데 갈수록 아이 쪽으로 축이 기우는 것 같아요. 지금 아이와의 시간은 다신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바로 이 순간’이니까요. 작업 측면에서는 제가 하나로 고착되는 걸 막아주는 것 같아요. 사회로부터 받는 압박들 덕분에(?) 제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 흔들림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작업의 동력을 만드는 것 같아요.
다음 작업으로는 어떤 걸 생각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모녀(母女) 서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어머니인데요. 저를 비롯한 많은 여성이 생명력을 포기하면서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자 하거든요. 모녀 관계라는 게 한없이 사소할 수 있는데도,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해지는 이유가 늘 궁금해요. 지난 몇 년간 천착하는 주제이고 공부도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너무 커다란 감정을 부르는 주제라 과연 몇 년 내에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다음 작업이 될지는 미지수에요.
올해도 작년처럼 작업에 전념할 수 있을까요?
원래 집에 있는걸 좋아했는데 전염병 때문에 어딜 못 간다고 하니 아주 답답하더라고요.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제가 사는 집의 다락 공간인 작업실에 한 번 틀어박히면 또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올해에도 이 다락방에서 작업에 전념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씽투육아 팟캐스트, 2016~현재 
작업하는 엄마들의 고민을 나누고 아카이빙하는 프로젝트
윤정은 시간을 귀하게 쓰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아요. 시간을 합리적이고 제대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히려 시간을 합리적이지 않게 쓰길 권하고 싶어요. 제가 강박감이 심하고 뭔가에 몰입하지 않으면 상태가 정말 안 좋아지는 경향이 있어서 사실 조금 더 게을러지고 싶어요. 최근에 캐나다 출신의 그림책 작가 피터 레이놀즈Peter Reynolds의 『느끼는 대로』(원제 『ish』)를 접하고 강한 ‘현타’가 왔어요. 저처럼 강박감이 있는 분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1년은 너무 짧으니 2년 후인 2023년 윤정은 어떤 상태일까요?
지금보다 좀 덜 불안하고, 좀 더 게을러졌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늦게 시작했으니 남보다 배로 열심히 해서 성과를 빨리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어요. 그러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생각이 많이 변했죠. 내 강박 때문에 놓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저의 꿈은 내게 해가 되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아이와 함께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 독서, 작업하는 시간 등 좋은 순간들을 더 확보해나가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마음껏 해주세요!
인터뷰를 응하며 ‘나는 왜 내 얘기를 하면 구구절절해질까?’ 싶었어요. 검열하는 저 자신도 보았고요. 이야기가 세련되고 멋지게 정리되지 않는 걸 겪으며 내 이야기를 담는 다른 형식은 무엇이 될까 생각하게 됐어요. 앞으로도 계속 방황하고, 갈등하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며 읽고, 쓰게 될 것 같네요. 이렇게 작업과 삶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를 마련한 배곳에 고맙고, 수원까지 발걸음 한 하얀, 형곤, 종현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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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Paju Typography Institute, PaTI)은 2013년 봄, 파주에서 움튼 독립 디자인 학교입니다. 새로운 디자인 교육의 필요성에 동감한 시각 디자이너 안상수와 여러 스승이 꾸린 교육협동조합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지혜와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무권위와 무경쟁을 지향합니다. 배우미는 스승과 함께 학교를 디자인하며 스스로 뜻한 바를 자발적으로 성취합니다. PaTI는 일반 대학에 준하는 4년제 바탕 과정 ‘한배곳’과 대학원에 준하는 2년제 심화연구 과정 ‘더배곳’, 1년 동안 원하는 수업을 듣는 ‘더배곳 진수 과정’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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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27.나무날
인터뷰·글: 전종현  |  멋지음·빛박이: 박하얀 
영상 촬영·편집: PaTI 영상연구소 이형곤 성하은
Paju Typography Institute Coop.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330  |  031-955-9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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